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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과 이 세상에서의 삶 고전15:29-34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의 육체적 부활과 함께 그와 연합된 우리 몸도 부활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육체적 부활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우리 믿음의 내용
가운데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세계 모든 교회들이 보편적으로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에도 마지막에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직역하면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올해도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부활절이 모든 교회 절기와 축제의 중심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들의 믿음의 기초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초대 교회 성도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의 믿음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절을 맞으면서 마지막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몸이 부활하여 주님과 영원히 교제하게 되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만 이러한 분명한 미래를 가지고 있는 성도들은 현재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의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몸의 부활을 믿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는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성, 두 번째로는 두 번째로는 부활과 현재 이 세상에서 우리 삶에서 가지는
의미들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부활의 역사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장에서 사도 바울은 부활에 대한
자세한 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장에서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부활하셨다고 하는 사실과 우리 신자의 부활을 연결시켰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그와 연합된 우리 신자도 부활하게 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고전15:12). 그래서 바울은 부활의 교리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역사성, 중요성, 의미 등에 대하여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부활의 역사성에 대하여 예수님이 실제 그 몸이 부활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여러 목격자들을 언급하면서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베드로에게 보이시고, 그리고 열두 제자에게 보이시고, 그후에 5백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이시고, 그
중에 태반이 살아있다고 하는 사실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삭되지 못한 자기에게도 보여주셨다고 증거하였습니다(고전15:5-8).
바울 당시나 오늘이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과 같은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은 신앙을 격려하기 위하여 후대의 사람들이 꾸며낸 신화로 보았습니다. 또 실존주의 철학사조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아닌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 마음속에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어느 정도의 유익이 있으면
괜찮다고 보는 견해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인간마음에 따라 존재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개인적인 확신으로 돌려버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몇 해 전에 감리교 신학대학의 홍정수 씨같은 같은 사람은 교수로 있을 때 부활은 역사가 아니고 사람이 믿어온 신앙의
전통(tradition)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하다가 학교를 쫓겨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견해들은 부활의 역사성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이 실재로 일어난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으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도덕적인 교훈이나 정신적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부활은 천지창조와 타락, 성육신, 고난받으심과 십자가에 죽으심, 성령을 보내심 그리고 주님의 재림과 같은 선상에
있는 전체 구원역사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의 육체적 부활과 함께 그와 연합된 우리 몸도 부활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 신자의 부활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고린도전서 15:13에서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이 말씀이 의미하고 있는 것은 우리 신자의 몸이 다시 사는
것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신자의 몸이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우리 몸도 다시 부활하게 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부활한 우리의 몸은 분명 본질상 우리
지금의 육체와 동일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특성이나 능력에 있어서는 다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우리의 몸이 부활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이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2. 부활신앙이 이 세상에서 가지는 의미 그러면 우리 신자들이 죽은 자들이 부활하게 된다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바울은 바로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첫 번째로는 29절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이 말씀은 신약성경
가운데 해석하기에 가장 어려운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교회에서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관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절은 번역하기에도 상당히 난해한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중요한 해석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해 보겠습니다.
하나는 지금 살아있는 있는 신자들이 세례를 받기 전에 죽은 신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기대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많은 해석이 있습니다만 바울이 이 본문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요점은 죽은 자가 다시 부활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세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이 있기 때문에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든지, 아니면 죽은 자의 부활을 기대하고 받든지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세례라는 의식 자체가 부활이 있다는 것을 믿는 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바울이 부활신앙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두 번째로 예를 들고 있는 것은 30-32절입니다.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바울이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다"는 표현은 문자적이냐, 아니면
상징적이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만 신약성경의 정황을 고려해 볼 때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에베소에서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이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그들의 이권이 없어지기 시작하자 폭동을 일으킨 사건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여집니다(참고. 행19:23-41). 중요한 것은
바울이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어떤 핍박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였지 신약성경을 통하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바울 자신의 입으로 증언하고 있는 고린도후서 11:23-29에
가장 잘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내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것이 있으니 곧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지 아니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바울은 이러한 모든 행위를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러한 핍박을 당하거나 참고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까?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이러한 일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 즉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위하여 날마다
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은 교회의 활동을 의미있게 해주고, 복음전파를 위하여 기꺼이 수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바울은
부활의 중요성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5:12-20에서 자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되고, 믿음도
헛된 것이 되고 만다고 하였습니다(고전15:14).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다가 갖은 고난을 받아 죽은
성도들은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15:18).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 복음을 위하여 목숨과 재산과
명예까지도 내어놓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삶을 통하여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는 당시에 로마가 세계를 지배할 때 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였고, 당시 최고의 학문 도장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세상에서 지위와 명예와 부가 보장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본문에서 부활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교회 역사 가운데 유명한 서머나의 감독 폴리갑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터툴리안이나 이레니우스의
글에 모두 사도 요한에 의해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임명된 폴리갑의 순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A.D. 156년2월22일 폴리갑은
그의 나이 86세에 잡혀 화형에 처해지는 순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총독 앞에 끌려가서 "황제를 경배하는 것이 무엇이 해로운가? 황제에게 절하라.
⋯ 네 나이가 많은 것을 생각하고 황제를 주로 맹세하라. 그리하면 놓아줄 것이다. 그리스도를 욕하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때 그가 한 말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줍니다. "나는 86년 동안 그 분을 섬겨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나를 한번도 실망시킨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해 주신 나의 왕을 욕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권력의 힘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다가 죽었습니다. 그
힘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역시 부활하신 주님이 그를 완전하게 구원해 주실 줄을 믿었기 때문에 구차하게 죽음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삶에서 부활신앙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활신앙이 이 세상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세 번째로 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32-34절에 부활신앙이 이 세상에서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부활의 교리를 부인하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삶이 세상에서의 쾌락을 즐기고 세상에 속한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그리스도의 부활과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의 관계를 설명하였습니다. 로마서 6:4에 보면 "그러므로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도덕적이고 영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분됨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하여 몸의 부활을 믿는 우리 신자들은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세속의 욕구에 지배를
받아먹고 마시는 일, 즉 자신의 쾌락을 도모하는 일에 목표를 두고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죽음으로 모든 생애가 끝난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을 절제와 책임성을 가지고 살기보다는 되도록 세상을 즐기는 방향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하나님 앞에서 서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런데 바울이 부활의 신앙이 없다면 "내일 죽을 터이나 먹고 마시자"라고 삶의 방식으로 살게 된다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이사야 22:12의 인용입니다. 바울이 왜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세상에서의 삶에 어떤 태도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구약의 문맥에서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당시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있을 것이기
때문에 회개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이 경고를 무시하고 백성들은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며 통곡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을 잡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사22:13)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기원전 722년에
멸망하였고, 남쪽 유다는 기원전 586년에 멸망하였습니다. 지금 바울은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고 세상에서 먹고 마시자고 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고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자들을 서로 연결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대비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고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자는 죽은 자가 다시 부활하는 날에 그 행한 일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말씀의 원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구체적으로 33-3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이 말씀은 당시의 헬라의 유명한 시인 메난더(Menander)의 희극
「타이스」(Thais)에서 유래된 격언으로 악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선한 행실을 더럽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말씀에서
"악한 동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표현은 헬라어 문자적인 의미로 바꾸면 "함께 있는 악한 사람들"(ץՌՉՋՉՁՉ ՊՁՊՁՉ)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오늘날의 교회 안에 있는 거짓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당시의 교회 안에서도 거짓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34절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을 따르지 말고 의를 행하고 죄를 짓는
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악한 사람들과 교제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거룩하고 의롭게 사는 생활, 이것이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부활절을 맞을 때마다 우려되는 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을 연례행사적으로 지키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 신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하여 부활하게 된다는 신앙이 이 세상에서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고 있습니까? 약 2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볼 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교회와 시대를 밝히는 환한
진리의 등불로 살았습니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기에 복음전파를 위하여 자신의 부귀와 명예와 생명까지 바쳤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날마다
죽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부활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서 쾌락지향적인 먹고 마시는 삶이 아니라, 말씀에 따라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하여 부활의 소망을 가지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우리 개인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실과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하게 된다는 부활신앙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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