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발산에 제단을 쌓으라!

< 본문 신명기 27:4-8 >

 

여러분,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이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쉽진 않을 것입니다. 다양한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이렇게 말합니다. “진정한 교회는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참으로 누추하고 보잘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귀중하고 사랑스러우며 높은 평가를 받는다. 제사장 아론은 성전에 나올 때, 장식품을 걸친 화려한 외모로 향기를 풍기며 영광스럽게 나타났으나, 그리스도는 가장 천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다.” 교회가 외적인 화려함에 도취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가 세상적 가치에 도취되어 그리스도의 정신은 잃어가고 겉모습의 화려함에 취해 있진 않는지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중세 기독교의 대표적인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이렇게 말합니다. “초대교회에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교회는 금으로 기둥을 만들고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엄청난 하나님의 집을 지었다. 우리의 교회는 땅도 많이 가지고 있다. 건물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은 잃었다.” 교회가 부유해지면서 교회가 가졌던 그리스도의 능력이 상실되고 말았다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게 중세시대나 종교개혁 시대만의 모습일까요? 세계적인 기독교 미래학자인 레너드 스위(Leonard Sweet) 교수는 오늘 우리 시대가 앓고 있는 가장 심각한 질병은 교회에 예수가 없는 예수 결핍 장애(Jesus Deficit Disorder)’라고 지적합니다. 건물은 화려해지고 예배는 품위가 있지만,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고 교인들이 자기들의 만족을 위해서 종교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예수님 대신에 성공 그 자체를 예배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교회다우려면 교회 안에서, 그리고 우리 믿음의 사람들 안에서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생명이고, 그게 바로 진실된 예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주신 말씀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에발산에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여호수아 8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여리고와 아이 성을 점령한 다음 가장 먼저 한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에 따라 에발산으로 가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께서는 에발산에서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궁금증이 생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 나오는 12-13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간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리심산에서는 축복을, 그리고 에발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에발산은 저주를 선언해야 하는 장소입니다. 기왕에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야 한다면 저주가 선언되는 에발산이 아니라 축복이 선포되는 그리심산에다 제단을 쌓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선포하는 그리심산이 아니라 저주가 선포되는 에발산에서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에발산에다 제단을 쌓으라고 하신 것일까요?

 

성경은 그에 대해서 명확한 대답을 해주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몇 가지 그 이유를 유추할 수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우리 인간은 죄로 인하여 늘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복을 받길 원합니다. 그래서 축복이 선포되는 그리심산에 서길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 존재의 근본을 생각하면 그 답이 나옵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그래서 죄의 결과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해 줍니다. 죄의식을 갖지 않고,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자기 마음대로 살던 사람도 율법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죄인이지만 죄로 인해 영원한 저주 아래 놓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저주가 아닌 축복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여 그 은혜와 축복 가운데 사는 방법, 그게 바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제사는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할 때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는 순간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이기에 늘 저주 아래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기에 늘 죄책감만 갖고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죄인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죄와 저주 아래 살아야 할 존재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죄를 용서받고, 저주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상황이 어떤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이 귀한 사실만은 꼭 붙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건물이 화려해지고 재정이 넉넉하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를 잃어버린 교회는 더 이상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 때에만 교회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선포하는 그리심산이 아니라 저주를 선포하는 에발산에 제단을 쌓으라고 하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에발산의 상황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에발산과 그리심산은 세겜을 가운데 두고, 북쪽이 에발산이고 남쪽이 그리심산입니다.<사진1> ‘에발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나뭇잎이 없는’ ‘벌거벗겨진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에발산은 벌거숭이 산, 민둥산입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에발산에는 나무나 풀이 거의 없습니다. 남쪽 그리심산에는 나무들이 제법 많은데 비해, 세겜 북쪽에 위치한 에발산은 마치 광야와 같이 나무들이 거의 없이 온통 돌과 바위로 뒤덮여 있습니다. 나무나 풀과 같은 생명이 자라기 힘든 산이 에발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에발산에다 제단을 쌓으라고 말씀합니다. 더군다나 제단을 돌로 쌓되, 다듬지 않는 돌로 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가나안의 우상들이나 신전, 그리고 신전의 제단들은 잘 다듬어진 돌로 멋지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제단을 쌓을 때에는 쇠 연장을 사용하여 다듬는 것을 금했습니다. 자연석 그대로를 가지고 제단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 우상의 모습을 조금이라고 본받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에발산에서 제단을 쌓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다. 민둥산입니다. 주변은 온통 돌과 바위덩어리입니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환경입니다. 그곳에 쌓은 제단 역시 다듬지 않아 투박하기 그지없습니다. 가나안 백성들이 그 모습을 보았다면 아마도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냐?’고 말입니다. ‘그렇게 제사를 드리고도 복 받기를 원하느냐?’고 말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영 성의가 없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정성을 드리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주변 환경도 그렇고 제단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님의 큰 그림이 있습니다. 에발산의 모습은 마치 현재의 가나안 땅과 같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지만 그들의 영적 상태는 척박하기 그지없습니다. 온통 우상숭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축복이 임할 것 같지 않습니다. 가나안 백성들은 자기들의 신에게 최선을 다해 제단을 쌓지만 그 신들이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지 않습니다.

  복을 주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세상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역사를 섭리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 여호와 하나님만이 세상에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척박한 에발산에, 저주가 선포되는 에발산에 제단을 쌓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복을 마치 에발산의 모습과도 같은 가나안 땅에 흘려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을 황량한 가나안 땅에 흘려보내야 할 책임이 이스라엘에게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척박하고 황량한 에발산에 제단을 쌓으라고 하신 이유가 그것일 것입니다. ‘너희가 살게 될 가나안 땅, 죄악과 우상숭배로 더러워지고 황폐화된 그 땅에 하나님의 은혜를 강물처럼 흘려보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위로부터 주어진 복, 하늘의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세상으로 흘러보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교회는 에발산과 같이 죄악으로 인해 황폐화되어 가는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복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복을 주셨다고, 그 복은 결코 교회의 것이 아닙니다. 세상으로 흘려보내야 할 몫입니다. 교회가 교회를 위해서 복을 쌓아놓으려고 할 때 교회는 부패해졌습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있을 때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68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창립기념주일을 맞아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지를 진지하게 되물어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흘러넘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린 교회, 사람이 주인 노릇을 하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세상에 흘려보낼 수가 없습니다. 다듬지 않는 돌처럼 교회가 외형적으로 볼품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는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세상에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와 성도는 우리가 받은 복을 세상과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도 그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누리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 많은 나라들 가운데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도 이스라엘을 통해 세계 열방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영원한 생명을 세상에 흘려보내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닮아가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흉내내서도 안 됩니다. 세상을 부러워해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예수로만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을 세상으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교회는 우리가 먼저 복을 받고, 받은 그 복으로 세상을 유익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배부르려 해서도 안 되고, 내가 만족해서도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주인 되시는 교회, 예수님의 생명이 넘쳐 에발산과 같은 세상으로 흘러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 황량한 에발산과 같은 세상에 하늘의 복을 나눠주는 교회가 되도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