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쌓은 제단

< 본문 사무엘상 14:31-35 >

 

예전에 말씀드렸던 이런 이야기를 기억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살아 있는 순교자라 불리는 리차드 범브란트(Richard Wurmbrand, 1909-2001) 목사님이 쓴 초대교회의 교부 성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9-407) 전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크리스소톰이 콘스탄티노플 주교였을 때 자기 교구 내의 외딴 시골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워낙 외진 곳인 데다가 오랫동안 사제가 없어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자신이 그곳을 자주 방문하기도 힘든 곳이라, 그는 궁리 끝에 신실한 믿음을 가진 한 농부를 선택해서, 짧은 기간 그를 교육시킨 다음 그 교회의 사제로 세우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플에 돌아온 뒤 그의 마음은 불안했습니다. ‘내가 자격도 없는 사람을 사제로 세운 것은 아닌가? 그가 예배를 제대로 인도하고나 있는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주일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그곳에 가서 예배에 참석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는 기둥 뒤에 숨어 자신이 임명한 농부 사제가 어떻게 예배를 인도하는지 지켜보았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크리소스톰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배운 것은 없지만, 그토록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사제를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짧았지만 설교하는 동안 농부 사제의 얼굴은 열정으로 빛이 났고,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적은 무리의 신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끝나자 크리스소톰은 제단 앞으로 나아가 농부 사제에게 축복해 달라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농부 사제는 무릎 꿇고 자신에게 기도를 청하는 사람이 자신을 사제로 임명한 주교 신부인 크리소스톰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주교님, 주교님께서 저를 축복해 주셔야 할텐데, 어찌 저에게 축복해 달라고 하십니까?” 그러자 크리소스톰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를 축복해 주시오. 나는 당신처럼 그렇게 뜨거운 불과 사랑을 가슴에 안고 예배드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소.” 그러자 그 농부 사제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크리소스톰에게 되물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교님, 다른 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도 있단 말씀인가요?”

 

여러분, 예배를 드림에 있어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리는 것 말고 다른 방식으로도 예배를 드릴 수 있나요? 비록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자신이 주교로부터 배운 대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농부 사제의 모습에서 우리는 참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식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신명기 6:5)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도 우리의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드려야 합니다. 그 방법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요한복음 4:23)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영과 진리로라는 말은 우리의 정성과 인격과 삶 모두를 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지금 드리는 이 예배에 얼마나 우리의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까? 지금 드리는 이 예배가 내 인생에 마지막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마음으로 드리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이야기를 하면서 본문 35절에서 사울 왕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는데, 그것을 사울 왕이 하나님을 위하여 쌓은 처음 제단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성경은 사울 왕이 처음 쌓은 제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굳이 그것을 그렇게 강조한 것일까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제단을 많이 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하란에 머물고 있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 세겜이었습니다. 그리고 세겜에 머물면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것이 가나안 땅에서 처음 쌓은 제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브라함이 처음 쌓은 제단을 말씀하실 때에 아브라함이 처음 쌓은 제단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그가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창세기 12:7)이라고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삭이 브엘세바에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을 때에도, 그리고 야곱이 벧엘에서 처음 제단을 쌓을 때에도 처음 쌓은 제단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냥 제단을 쌓았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오늘 본문에서는 사울 왕이 쌓은 제단에 대해서 처음 쌓은 제단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울이 제단을 쌓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인 사무엘상 13장에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울이 왕이 된지 2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그동안 나라의 모습을 갖추지 않았던 이스라엘이 왕을 세우고 군대를 조직하는 등 나라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치룬 전쟁이 블레셋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왕자 요나단이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스라엘 땅에 주둔하고 있던 블레셋의 수비대를 공격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블레셋이 어마어마한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침공해 들어왔습니다. 이제 막 나라를 세우고, 군대라고 해 봐야 겨우 3천 명밖에 되지 않은 이스라엘이 그 블레셋과 싸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비록 블레셋 군대와 대치하고는 있었지만, 어마어마한 숫자의 블레셋 군대를 보자 두려워 떨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사울 왕은 자신의 멘토인 사무엘 선지자를 급하게 불렀습니다.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제사를 드러야 하는데, 사무엘 선지자는 오기로 약속한 날짜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의 군인들은 두려움에 도망치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3천 명의 군인들 가운데 남은 사람은 불과 600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전쟁통에 남아 있다가는 죽을 게 너무나도 자명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군인들이 도망치고 만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급해진 사울 왕은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사울이 왕이 된 지 처음 드린 번제, 처음 쌓은 제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이 처음 쌓은 제단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오늘 본문의 제단을 처음 쌓은 제단이라고 말씀합니다. 실제적으로 처음 제사를 드린 후 시간은 그렇게 오래 흐르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나타난 사무엘 선지자는 제사를 드릴 제사장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주관하여 제사를 드린 사울 왕을 호되게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상황은 호전되는 듯했습니다. 성경이 계속해서 강조한 것처럼, 전쟁은 군사의 숫자나 군사력의 강약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의 편에 서시느냐에 따라서 전쟁의 승패가 좌우됩니다. 왕자 요나단은 자신의 병기든 소년 하나만 데리고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가서는 블레셋 군사 20여 명을 죽이게 됩니다. 요나단은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진영에 침투하기 전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으니라.”(사무엘상 14:6)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성경의 가치를 그래도 보여준 요나단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런 고백처럼 불과 2명이지만, 적군 블레셋 진영에 들어간 요나단과 소년은 20여 명의 블레셋 군인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자 블레셋 군인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스라엘 군인 두 명이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다면, 자기들의 숫자가 많을지라도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를 때 자기들이 패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이에 용기를 낸 사울이 블레셋 군대를 향해 전투를 개시하자 블레셋 편에 있던 히브리 사람들이 사울 왕의 편으로 돌아섰고, 블레셋 사람을 두려워하여 도망갔던 이스라엘 군인들이 돌아와 힘을 합쳐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이스라엘 군대가 승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전쟁의 승기는 이스라엘 쪽으로 돌아왔는데, 이스라엘의 군사들은 너무나도 피곤했습니다. 전쟁을 치르느라 피곤한 것도 있었지만, 사울이 전쟁을 마칠 때까지는 아무 것도 먹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왕의 명령에 따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전쟁을 치르던 이스라엘 병사들은 블레셋 군사들이 놓고 간 음식을 보자 눈이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전쟁을 할 때는 적군을 뒤쫓아 가느라 몰랐는데, 적진에 도착하여 양과 소 등 짐승을 보자 허기짐을 견뎌내지 못하고 그 짐승들을 끌어다가 잡아 고기를 먹는데, 피째 먹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율법에서는 고기를 피째 먹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의 명령을 지키려다가 율법을 어겨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안 사울이 율법을 어긴 백성을 책망하면서도, 허기진 군사들을 위해 짐승을 잡아 고기를 먹게 했습니다. 그게 오늘 본문 31-34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울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고, 그것이 사울이 쌓은 첫 번째 제사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오늘 본문 35절에 기록된 제단을 사울 왕이 드린 두 번째 제사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사울 왕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두 번째 드린 제사를 첫 번째 제단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두 번째 드린 오늘 본문의 제사가 첫 번째 제사라고 불리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앞선 제사는 제사장이 아닌 사울 자신이 드린 제사이고, 이번에 드린 제사는 제사장이 드린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드리도록 구별된 제사장이 드린 첫 번째 제사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앞인 18절에 의하면 사울은 제사장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도록 명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무엘 선지자는 아닐지라도, 사울은 제사장을 불렀고 그 제사장으로 하여금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드린 첫 번째 제사가 오늘 본문의 제사이고, 그 제사드림이 사울이 처음 드린 제단이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울이 하나님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드린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요나단을 통해서 사울도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시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잘못된 명령으로 백성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되었고, 범죄한 백성들을 데리고 전쟁을 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전쟁에서 패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백성들을 돕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요나단과 소년, 단 두 명이서 블레셋 진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블레셋 군사들의 사기를 저하시켰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요나단의 믿음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까지 전쟁에서 승기를 잡게 되었고, 블레셋은 도망치기에 급급한 반면 이스라엘의 군사는 숫자가 적을지라도 블레셋을 뒤쫓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계속해서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범죄한 백성들의 죄에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마치 여리고 성을 점령한 이후 아간의 범죄 때문에 아이성 전투에서 실패한 여호수아의 경험처럼, 범죄한 백성이 있는 한 하나님께서 도우심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절박한 심정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 가운데 하나가 죄에 대한 절박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제나 함께하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도움을 구하는 가장 올바른 자세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의지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 우리가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는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마땅한 사람처럼, 하나님께서는 나를 도우시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덧입을 수 없습니다. 내가 낮아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내 지혜가 부족하기에 주님께서 지혜를 주셔야 한다고 간구하는 마음으로 나아갈 때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내게는 능력이 없기에 능력 주시는 주님을 의지해야 세상을 이기고 유혹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내 힘으로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지 않아도 내 지혜로 모든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내 손을 잡아주지 않으셔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끄떡없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결코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과는 결코 같지 않습니다.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울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을 보여야 마땅합니다. 처음 쌓은 제단이 신앙의 출발이었다면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제단을 쌓음으로 믿음이 성숙해져 가야 합니다.

  그러면 사울은 어땠을까요?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면 당연히 그 다음에도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전쟁에 승리하고도 하나님께 해 드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본문 후에 나오는 47-48절의 기록에 의하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만 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암과 암몬 등 여러 나라들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했습니다. 분명 그 전쟁에서도 하나님께서 사울과 이스라엘을 도우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하나님께 감사했다거나,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칭송했다는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15장에 의하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사울 왕은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세웠다.’는 말은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가로챘다는 뜻입니다. 그 일로 인해서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맙니다.

  처음 제단을 쌓을 때 가졌던 마음을 계속해서 간직했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전쟁에 승리하면서 점점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사울이 그런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만일 사울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낙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권력의 자리에 오르고 난 후에 그의 마음이 변질되었습니다.

 

처음 제단을 쌓을 때에는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니 그 때만은 정말 하나님의 긍휼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계속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계속 간직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은 신앙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되어갈 뿐이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살펴보십시다. 지금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마음,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지금 그런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그 마음을 끝까지 잘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체험했다면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 은혜가 계속되도록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마음도 사울 왕처럼 점점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드린 오늘의 예배가 처음 쌓는 제단, 그 후에도 쌓아본 적이 없는 마지막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은 오늘 본문 이후에 제단을 쌓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단이 처음 쌓는 제단이자 마지막 제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어야 합니다. 처음 드리는 예배는 있을 수 있어도 마지막으로 드리는 예배는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광의 하나님, 영광을 주님을 찬송하며 예배할 때까지 우리의 예배에는 멈춤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예배가 늘 처음 드리는 예배처럼 감격적인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가 드리는 마지막 예배인 것처럼 간절함으로 드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마지막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야 할 존재이며, 동시에 하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쌓은 제단!’ 참 감격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사울에게 그 감격적인 표현은 슬픔의 표현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울 왕을 거울삼아 우리의 삶은 늘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가 늘 처음이며 마지막 예배인 것처럼 드려야 하고, 처음의 감격과 기쁨을 인생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의 삶이 예배다의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예배자이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힘든 순간 앞에서든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예배자, 어떤 순간에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예배자 말입니다. 우리의 온 맘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여야 합니다. 다른 예배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