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과 버팀목
< 본문 – 갈라디아서 2:8-9 >
『연탄길』이라는 유명한 수필집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의 소외된 이웃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글을 많이 쓴 이철환 작가의 대표적인 수필집입니다. 거기에 ‘아름다운 동반자’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친구의 결혼식 날, 교회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하늘은 맑았고 가을 옷을 입은 고추잠자리들이 허공을 분주히 날아다니고 있었습니다. 화단 한쪽에는 햇볕에 얼굴을 그을린 해바라기가 줄을 지어 서 있었습니다. 사회자의 인사말이 끝나고 신랑이 입장했습니다. 곧이어 신부 입장을 알리는 피아노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때 술렁거리던 식장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신부가 들어올 입구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잠시 후 고개 숙인 신부가 보였습니다. 다리가 불편한 신부는 아버지 손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왔습니다. 중심을 잡으려고 안간힘 썼지만 느리게 연주되는 피아노 반주에도 신부는 발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쓰러질 듯 한쪽 발을 내딛고는 서둘러 다른 발을 내딛다가 신부는 그만 중심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식장 안은 술렁였습니다. 신부를 일으켜 세우는 신부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습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주례를 향해 뒤돌아섰습니다. 그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보였습니다. 신랑이 자신의 한쪽 발을 신부의 웨딩드레스 밑으로 살며시 넣고는 신부의 짧은 왼쪽 발을 자신의 발등으로 떠받치고 있는 것입니다. 신랑은 중심을 잡으려고 신부보다 더 많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몇 달 후 친구가 결혼한 그 부부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부부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의 대문은 빨갛게 녹슬어 있었습니다. 방 안에는 친구의 아내가 읽었던 수많은 책들이 사열하는 호위병처럼 벽면에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결혼 사진 속의 신랑 신부는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예복은 초라했습니다. 결혼식 날 신랑은 낡은 양복에 뒤축이 다 닳은 구두를 신고 있었습니다. 신부가 입고 있던 빛바랜 웨딩드레스도 사진관에서 값싸게 빌려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절약한 결혼 비용과 축의금 일부를 고아원과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개안 수술비로 보냈습니다. 그들의 도움으로 한 아이의 엄마가 개안 수술을 받았습니다. 앞 못 보는 엄마의 손을 잡고 지하철에서 바구니를 들고 다니던 어린 딸에게 이제는 엄마가 희망이 돼줄 수 있었습니다. 친구의 아내가 준비해온 저녁을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러다 무심코 방안을 둘러보다 액자 속에 담겨 있는 분홍색 편지를 보았습니다. 신랑이 그의 아내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늘 기쁨으로 당신의 한쪽 다리가 되겠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당신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차라리 내 다리를 절게 해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부부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관계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아담의 돕는 배필로 하와를 만드신 이유입니다. 다리가 불편한 신부의 한쪽 다리가 되어주겠다는 신랑의 고백은 그래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말인데, 왜 우리에게 그것이 그렇게 감동적인 말로 들릴까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런 지극히 당연한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로 돕는 배필인 부부가 서로를 돕는 것보다 자신의 행복과 자신의 만족을 먼저 생각하는 사회가 되다 보니, ‘기꺼이 당신의 한쪽 다리가 되겠다.’는 신랑의 말이 우리의 가슴에 울림을 주는 말로 들리는 것 아닐까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쓰러지려 할 때 서로가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이 부부의 관계라고 한다면, 그건 비단 부부의 관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런 도움이 되어주는(에제르) 관계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것은 더 넓게는 우리 인간이 그렇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주는 관계여야 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은 곧 교회의 존재 목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세상에 버팀목이 되어주고, 세상을 돕는 에제르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오늘 창립66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창립 66주년을 맞은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이기를 원하실지를 깊이 되묻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을 ‘기둥 같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인 사도 야고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야고보는 갈라디아서 1:19절에서 사도 바울이 ‘주의 형제 야고보’라고 지칭했던 그 야고보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사역할 때에 예수님을 믿진 않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심을 보고(고린도전서 15:7)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야고보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는 처음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렸을 때 그 회의에서 의장을 맡을만큼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우리 성경에 있는 야고보서를 기록하였고, 전승에 의하면 주후 62년 네로 황제의 박해 때 총독 안나스의 손에 순교당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게바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베드로의 아람어식 이름입니다. 요한 역시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 12제자 가운데 특별히 가까이에 둔 제자가 세 명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실 때에 이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셨고,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에도 이들 세 제자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세 제자만 데리시고 동산 깊은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면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듯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제자는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고, 특별한 사건을 함께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야고보 사도는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서 가장 먼저 순교를 당하고 맙니다.(사도행전 12:2)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핵심 사역자였던 야고보 사도가 순교당하면서 주의 형제 야고보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 그룹에 포함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둥과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오 요한’이라고 말씀한 것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둥과 같이 여기는’이라는 말은 ‘기둥으로 인정받은’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세 명이 예루살렘 교회에서 기둥으로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과 같이 여김받은 세 명의 지도자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까? 지금 사도 바울은 역할의 분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과 같은 세 지도자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은 오늘 본문에 ‘할례자들’이라고 표현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자신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는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서 사도 바울의 입지가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던 사람이 사도라고 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다니는 것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할례자들이라고 말하는 유대주의자들이었습니다. 비록 그들 또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들은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할례도 강조하지 않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도 강조하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사역에 대해서 못마땅해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을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과 같이 여김받는 교회의 지도자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주의 형제 야고보 역시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12제자로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교회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세 명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가장 먼저 ‘야고보’를 거론하고 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이 야고보는 사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12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난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첫 번째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렸을 때 의장 역할을 했던 사람은 베드로도 아니고 요한도 아닙니다. 야고보입니다. 사도가 아닌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지도자였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예루살렘 교회의 세 명의 지도자가 있기에 예루살렘 교회는 든든히 서 가는 교회, 날로 흥왕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 세 명의 지도자가 예루살렘 교회로 대표되는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기둥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면,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신과 바나바 역시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기둥과 같은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 명의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 자신과 바나바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서 세 명의 기둥과 같은 사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선교를 위해서는 사도 바울 자신과 바나바가 기둥과 같은 일꾼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이들은 각각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위한 사역자들로 세움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비유로 한다면, 세 사람은 유대인들을 위해서 기둥으로 세워졌고,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들을 위해서 기둥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기둥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함께 섬기며 기둥같은 존재로 쓰임받았습니다. 그 세 명의 기둥같은 사역자들은 예루살렘 교회, 더 나아가 유대인 공동체라는 큰 집을 버티는 기둥들입니다.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은 이방인들의 교회, 이방인 신앙공동체를 버티는 기둥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더욱 큰 집을 버티는 기둥들입니다. 유대인 선교와 이방인 선교라는 커다란 두 개의 기둥의 있기에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기둥들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교여행을 마치고 늘 예루살렘을 방문한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자신은 이방선교의 사명을 받고, 이방선교에 기둥같은 일을 한다고 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에 기둥 같은 세 지도자들과 이방선교의 기둥 같은 두 지도자가 ‘친교의 악수를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두 역할에서 기둥과 같은 지도자들이 친교의 악수를 하고, 다시금 각자 사역의 자리로 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선교를 위해서 이방인에게로 갔고,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유대인 선교를 위해서 할례자들에게로 갔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기둥이면서 동시에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창립 66주년을 맞은 우리 교회도 기둥과 버팀목이 되는 교회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 내부적으로는 우리 교우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를 세우는 기둥과 같은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기둥 같은 일꾼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에 있어서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기둥과 같은 믿음으로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베소서 4장에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범사에 그(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에베소서 4:15)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말입니다. 주님을 더 많이 닮아가고, 주님의 선한 일꾼이 되어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여주는 성숙한 믿음에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홀로 높은 기둥처럼 세워진다고 해서 아름다운 건축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튼튼한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기둥들이 필요하고, 그 기둥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유대인들이 중심이 된 예루살렘 교회에 야고보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나 요한 한 사람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고보와 베드로, 그리고 요한이 서로 기둥이 되어 예루살렘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갔습니다. 이방 선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선교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은 택하시고 불러 사명을 주셨지만, 사도 바울 한 사람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를 세우셨고,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우리가 자주 만나는 것처럼 사도 바울을 위해서 협력한 수많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기둥과 같은 일꾼들이 서로 협력하여 세계 선교라는 커더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믿음 위에 굳건하게 서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 긴밀한 연결고리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기둥과 같이 세워지되 서로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리 굳건하게 세워진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거센 비바람이 불어올 때 홀로 있는 기둥은 무너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버티목이 되어줄 때 거센 비바람에게도 끄떡하지 않는 든든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생활에서 성도의 교제가 아주 중요합니다.
비록 아직까지는 코로나19로 인해 교회 안에서 모임을 가질 수 없는 상황이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조심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믿음의 형제들 사이에 믿음의 교제마저 단절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자주 기도하는 것처럼, 코로나를 이겨내고 교회에서 예배가 회복되어야 하고 성도의 교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성도의 교제는 단순한 사귐이나 친교를 나누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믿음이 흔들릴 때 서로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세상의 거센 유혹 앞에서 흔들릴 때 우리로 죄에 빠지지 않게 붙잡아 주는 것도 성도의 교제가 큰 힘이 됩니다.
같은 이치로 교회가 교회됨에 사역을 감당함에 있어 교회 밖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만 구원받고 나만 천국의 기쁨을 누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두 팔을 벌려 세상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교회를 통해 세상에 하늘의 복이 흘러가야 합니다. 교회가 있음으로 세상이 행복해져야 하고, 교회가 있음으로 세상이 아름다워져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에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죄악으로 쓰려져가는 세상을 죄악으로부터 지켜주는 버팀목, 코로나19로 인해서 힘들어 하는 세상에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빌려주는 버팀목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 버팀목이 되어줄 때 세상도 교회의 버팀목이 되어줄 것입니다.
미국 켈리포니아 레드우드국립공원에 있는 ‘레드우드’(redwood)라는 미국삼나무 이야기입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를 거치면서 벌목으로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100m가 넘도록 힘차게 자라고 있습니다. 최대 130m까지 자라는 이 삼나무는 큰 키에 비해서 뿌리가 깊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거센 비바람을 이겨내며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뿌리들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들이 서로 얽혀 서로를 지탱해주지 않는다면 분명 비바람에 쓰러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그리고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믿음의 식구들도 레드우드 국립공원의 삼나무처럼 믿음이 자라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버팀목이 있어야 우리가 기둥과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는 가족끼리 서로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가 기둥과 같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교우들끼리 서로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기둥과 같은 일꾼들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회도 교회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고, 세상도 죄악으로 멸망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꿈꾸시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줌으로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함께 기둥과 같이 자라가는 믿음이 되십시다. 오늘 본문 8절에서 ‘베드로에게 역사하신 이가 사도 바울 자신에게도 역사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인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에게 성령으로 역사하신 것처럼, 이방교회를 섬기는 사도 바울 자신과 바나바에게도 성령께서 역사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서로의 버팀목이 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역사하신 성령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도 역사하십니다. 특별히 우리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줄 때, 성령의 역사는 우리를 통해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