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암 5:21-27

 

   지난 2008년 서울청계광장에서 광우병사태로 미국산소고기 수입반대촛불집회가 열린 일이 있습니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종이로 피켓을 만들어 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피켓에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그리고 2016년 11월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던 박근혜대통령탄핵을 위한 촛불집회와 2019년 서초동 촛불집회에서도 같은 문구가 쓰여 진 피켓을 볼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모인 집회가 아닌데 성경 문구로 피켓을 만들어 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구는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즐겨 사용하는 하나의 슬로건이 된 것입니다. 과연 이분들이 이 문구의 성경적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라는 문구는 오늘 본문 24절 말씀을 축약해서 슬로건으로 만든 것입니다. 2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무엇(what)

 

   그러면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선 “정의를 물같이 흐르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의’란 무엇일까요? 이 말은 원어 ‘미쉬파트’(משׁפט)를 번역한 것입니다. 영어성경에서는 이 말을 ‘justice’로 번역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이 말은 주로 사회법과 관련된 상황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재판관들이 법대로 바르게 재판하는 것, 그리고 백성들이 법을 잘 지키며 살아가는 것을 정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정의가 물같이 흐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물이 흐르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고 순리입니다. 그런데 댐을 건설한다든지, 둑을 쌓으면 물은 순리대로 흐르지 못합니다. 가두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정의가 물같이 흐르게 하라는 것은 사람들이 순리대로 법을 지키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권력이나 돈 그리고 인간관계 같은 것들 때문에 법이 순리대로 지켜지는 것이 방해받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에 관한 일화입니다. 수상시절 각료회의에 가느라고 과속을 했습니다. 교통경찰이 차를 세웠습니다. 처칠은 자신이 수상인데 각료회의에 늦어서 과속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교통경찰은 자신은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고 배웠다며 범칙금 스티커를 발부했습니다.

  각료회의 후에 처칠이 감동을 받고 경찰청장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법을 수호하는 경찰이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칭찬하며, 그 경찰을 특진시키라고 명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청장이 이렇게 답했습니다. “과속차량을 적발했다고 특진시키는 규정은 없습니다.”

  처칠이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경찰한테 두 방 먹었네! 허허”

 

   바로 정의가 물처럼 흐르는 사회가 이런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법의 잣대가 달라지는 사회, 정의가 돈의 영향을 받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사회입니다. 권력이 있고 없음에 따라 법의 잣대가 달라지는 사회, 정의가 권력의 영향을 받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사회입니다. 내편이냐 아니냐에 따라 법의 잣대가 달라지는 사회, 정의가 진영의 영향을 받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는 정의가 물같이 흐르는 사회는 아닙니다.

   오늘 과연 우리사회에 정의가 물같이 흐르고 있을까요? 청문회에서 폭로되는 공직자들의 각종 불법 행태들, 그리고 하루가 멀다고 터지는 각종 부정과 비리 사건들을 보면, 아모스시대처럼 정의가 물같이 흐르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외쳐야 하고 또 이 말씀대로 정의가 물같이 흐르게 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하겠습니다.

 

   다음으로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공의’는 무엇일까요? 이 말은 원어 ‘체다카’(צדק)를 번역한 것입니다. 영어성경에서는 이 말을 ‘righteousness’로 번역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이 말은 주로 하나님의 법과 관련된 상황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공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 25:15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장사를 할 때 공정한 추와 되를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의 구체적인 예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정이 잘 지켜지도록 살아가는 것이 공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의가 강같이 흐른다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의 강들은 대부분 와디(wadi)라고 하는 건천입니다. 우기에 비가 많이 올 때 물이 흐르다가 건기가 되면 물이 말라버리는 일시적인 강, 강 아닌 강을 말합니다. 여기서 강같이 흐른다는 말은 와디같이 흐르다 말다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강들처럼 항상 흐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공의가 상황에 따라 지켜지기도 하고 지켜지지도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지켜지는 것을 말합니다.

   근자에 우리사회에 “엄빠찬스”라는 말이 시사용어로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엄마나 아빠의 지위나 힘을 이용해서 자식들이 특혜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청년들이 공정하지 못한 우리사회의 한 단면을 지적하면서 만들어 쓰는 말입니다. 다른 일에는 공정하다가 자식문제에 대해서는 공정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내로남불”이라는 말은 시사용어를 넘어서 보통명사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같은 일인데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말입니다. 상대편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면 예리하게 비판하다가 우리 편이 같은 일을 저지르면 감싸주고 변명합니다. 대상에 따라 공정의 잣대가 달라지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공의를 잘 지켜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공의가 강같이 늘 흐르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 속에서 빛이요 소금으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왜(Why)

 

   그러면 아모스 선지자는 왜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라고 외쳤을까요? 

   우선 아모스 선지자가 이 말씀을 누구를 대상으로 한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5:1을 보면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4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말씀은 당시 북왕국 이스라엘 족속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5:18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그리고 본문 21절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사람들, 그리고 절기를 지키며 예배와 기도를 위해 모이기를 힘쓰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나름대로 신앙생활에 힘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아모스는 이 사람들에게 왜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신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자신은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법을 잘 지키지 않고, 공정한 삶을 살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 언론의 분석에 따르면 코로나사태가 일어난 후 우리사회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이 기독교라고 합니다. 물론 교회에 헌금이 줄고, 모이지 못하면서 교인도 크게 감소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타격은 이미지 실추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신뢰도가 지난 10년간 약 32% 정도를 유지해왔었는데, 이번 코로나사태 이후 21%로 급감했습니다. 최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비롯한 몇몇 기독교단체가 사죄성명을 내면서 대중의 정서가 “교회라면 지긋지긋하다”라고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코로나사태 이후 이렇게까지 타격을 받게 된 것은 최근 두 차례의 집단감염 확산이 두 기독교 선교단체에서 비롯됐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인터콥이라는 선교단체가 운영하는 상주의 열방선교센터에서 시작된 집단 감염이고, 다른 하나는 IM선교회가 운영하는 몇몇 국제학교들에서 시작된 집단감염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 두 단체가 모두 신앙적인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훈련에 철저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평신도 선교사로 자원하여 헌신하도록 훈련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다음세대를 복음의 사람으로 교육하기 위해 따로 국제학교를 세워 교육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기본적인 방역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로 5인 이상 집합금지를 하고, 교회에서는 온라인예배를 드리고, 학교는 온라인 수업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규모집회를 벌이고, 합숙하고 대면수업을 진행하다가 집단감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방역수칙에 대한 교육 없이 곳곳으로 흩어져 대규모 집단감염을 확산시킨 것입니다.

   가뜩이나 사회적 거리두기의 피로도가 쌓여있고, 소상공인들이 더 이상 견디기 힘든 한계상황에 몰려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하루 빨리 사회적 거리두기가 하향 조정되기를 학수고대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두 곳의 집단감염으로 상황이 더 악화된 것입니다. 언론과 세상 사람들의 원성과 질타가 쏟아 졌습니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교회를 향해 계란을 던지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모스 선지자가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라고 질타한 바로 그 상황입니다. 우리가 법을 지키지 않고 사회적 의무를 다하지 않은 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예배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런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떻게(How)

 

   그러면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을 보면 아모스 선지자가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는 일을 뒤로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만 집중하는 것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람과의 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치중하면서 사람과의 관계는 소홀히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런 일들이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말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관계된 일에는 열심이지만 사람들과 관계된 일은 게을리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잘 하는데 가정생활, 학교생활, 직장생활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을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마 22:37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둘은 다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특히 하나님 사랑이 첫째 계명이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을 이웃 사랑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 5:23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웃을 사랑하기는커녕 이웃을 고통스럽게 해 놓고 하나님 사랑한다고 예배를 드리러 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동전은 양면이 있습니다. 만일 동전이 한 면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100원짜리 동전이 한 면만 있다면 50원으로 쳐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돈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0원입니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이웃사랑 없는 하나님사랑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사랑 없는 이웃사랑은 이웃에게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은 함께 가야합니다. 그래야 그 하나하나가 제대로 실현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의 하나가 예배입니다. 그리고 이웃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의 하나가 정의와 공의를 잘 지키는 것입니다. 이 둘은 늘 함께 가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서 예배를 드려야 하고, 또한 이웃을 향해서 정의와 공의를 잘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롬 12:1에서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과거 구약시대에는 제물을 죽여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죄인인 나는 살고 나 대신 제물이 내 죄 때문에 죽었습니다. 이 때 드려야 할 제물은 엄격한 규정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내용이 레 22:21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바로 “아무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입니다. 제물에는 아무런 흠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규정을 지키기 위해서 제사장들과 제사하는 이스라엘백성이 최선을 다했습니다. 처음에는 흠 없는 것으로 잘 골라서 제물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러다 아예 제물로 바칠 것을 구별해서 흠 없게 관리했습니다. 나중에는 제사장들이 따로 흠 없는 제물을 준비했고, 이스라엘백성은 돈 주고 제물을 사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한 마디로 제물관리를 철저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제 신약시대에 와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영원한 제물로 드려지셨기 때문에 더 이상 제물을 죽여 드리는 제사는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제물 없이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우리가 예배드릴 때 우리 자신을 제물로 드린다는 생각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여서 드리는 제물이 아니라 산 채로 제물로 드린다고 해서 산 제물이라 불렀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대로 예배를 드릴 때 영적으로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제물인 우리가 흠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사회법을 어겨서 정의를 훼손시키거나 또한 공정을 어겨서 공의를 훼손시킨다면 산 제물로서 우리에게 흠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의와 공의를 잘 지켜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