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질 문 – 하나님이 여러분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시기를 원하실까요 ?
I. 서 론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제3일에 다시 살아나야하실 때가 되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한 후에 제자들에게 알리셨습니다.(마 16:21)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제자들이 그런 일이 예수님께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렸지만 그 길은 예수님이 가셔야 할 길이기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행렬이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 두 명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맞은편 마을이 어딜까에 대한 논쟁은 있습니다.
베다니로 볼 수도 있고, 벳바게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벳바게로 봅니다.
예수님은 그 동네에 가면 나귀와 나귀 새끼가 매여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것들을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그러면 누가 왜 남의 나귀를 끌고 가느냐고 할 것인데, 그러면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 둘이 예수님의 명하신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 나귀를 타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으로 가서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 것을 마태는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시온의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하라”는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제자들은 나귀와 나귀 새끼 모두를 다 끌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중에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이들이 예루살렘 성 안으로 입성하시자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카페트를 깐 것이다) 다른 이는 나무 가지(종려나무)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호산나(Hosanna)라는 뜻은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 예루살렘 입성 동영상 ***
종려주일은 이렇게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렇게 절리로 지키는 것은 거기에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어서 지키는 것입니다.
II. 본 론
오늘은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 종려주일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희생의 제물이 되시려고 입성하셨습니다.(창 22:1-4)
그러면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 예루살렘은 어떤 곳일까요 ?
이 예루살렘을 아브라함 때에는 모리아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 모리아 땅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 아브라함 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땅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이 지시하는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서 가지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제3일에는 아브라함은 두 사환은 남겨두고, 이삭에게 장작을 지우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산으로 가서 하나님께 번제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 이삭의 모리아산 사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같은 것이 있습니다.
①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를 번제물로 드린 것과 같이 하나님도 사랑하는 동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번제물로 드리셨습니다.
②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도 나귀를 끌고 모리아산으로 갔습니다.
③ 이삭이 번제물이 되기도 다시 살아서 돌아온 것과 같이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번제물이 되셨다가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 이삭이 번제물로 드려진 곳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이삭과 같이 번제물이 되기 위하여 입성하신 것입니다.
1) 이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삭이 모리아 산으로 간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뜻이였습니다.
자기의 뜻은 조금도 없습니다.
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이삭은 모리아 산으로 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신 것도 전적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감람산에서 기도하실 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 하나이다 하고 자기의 뜻을 완전히 버리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1:4)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셨습니다.
2) 그 일은 자기 자신 밖에는 할 자가 없는 일이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드릴 자식은 이삭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삭을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번제로 드릴 수 있는 자식은 이 이삭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자기 스스로 번제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자가 없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이세상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죄가 없는 자라야 하는데, 예수님 외에는 그런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류를 구원하는 십자가를 지시는 일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외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희생의 제물이 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이렇게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그 뜻을 이루려고 하시자 그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예수님께서 순종하신 사건입니다.
이 종려주일과 이어지는 고난주간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절기입니다.
이 전도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그는 구원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2. 성전이 되려고 입성하셨습니다.(대하 3:1)
모리아 산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것은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준비를 하고, 그의 유언에 따라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데, 그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 된 곳이 바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 이 모리아 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모라아 땅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신 것은 이 성전이 되기 위하여 입성하신 것입니다.
인류의 참 성전이 되시기 위하여 입성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셔서 제일 먼저 하신 것이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것입니다.
①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곳입니다.
② 성전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하셔서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내 집은 만인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막 11:17)고 하시며 책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리아 땅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골고다 산에 올라서 제물이 되심으로,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는 성전이 되어 주셨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길이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고,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마 27:51)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종려주일과 이어지는 고난주간은 우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성전에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주간입니다.
3. 고난의 길을 가시기 위하여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가시는 일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마 16:21)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왕이 되기 위하여, 영광을 얻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위하여 입성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은 “다 알고 가야하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길이였습니다.
예수님이 그 길을 가는 것을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는 것으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모리아 땅으로 데리고 가서 하나님이 지시하는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① 아브라함에게 그 길은 죽기도보다 싫은 길이였습니다.
100세에 얻은 외아들을 번제로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
② 이삭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를 죽여서 각을 떠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고 아버지가 가자고 하는데, 그 아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따라 나섭니다.
그 모습을 볼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
옛날에 아들을 남의 집에 양자로 줄 때 부모는 생전 안 하시던 좋은 옷을 사서 입히고, 맛있는 음식을 해서 먹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자식은 좋다고 입고, 맛있다고 먹습니다.
그것을 보면 부모의 마음은 속으로 찢어집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였습니다.
③ 아무 것도 모르는 이삭은 아버지 “번제에 쓸 불과 나무는 있는데 어린양은 어디에 있은까 ?”라고 묻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들이 이런 질문을 받을 때, 그 아들을 죽이러 가는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겠습니까 ?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길은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을 가시기 위함이셨습니다.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위하여 입성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길을 떠나시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이것은 예수님을 따라 천국에 가려고 하는 자들은 다 이 길을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자들은 다 고난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길을 가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만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천국 가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어떤 고난과 고통이 있어서 주님 따라 가는 길입니다.
폴란드의 야루젤스키(Jaruzelski) 공산당 서기장 정부는 공장들과 병원들과 그리고 다른 공공기관에 명령을 내린 것과 같이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상을 교실 벽에서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천주교 주교들은 그 명령에 반대를 했고, 그것이 폴란드 전국적으로 분노의 물결을 일으켰다. 그래서 정부가 양보를 했다. 정부는 법은 그대로 법전에 남아 있으나 그러나 특별히 교실에서 십자가를 제거하는 것은 강제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가르볼린(Garwolin)에 있는 한 공산당 열심당원인 학교 이사가 법을 지켜져야만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강의실에 개교 때부터 있었던 7개의 큰 십자가를 강의실에서 제거했다. 그러자 그 날 오후에 한 떼의 부모들이 학교에 와서는 더 큰 십자가를 걸었다. 학교 이사는 그것을 즉시 다시 떼어냈다.
그러자 600명의 학생들 중에 2/3의 학생이 연좌데모에 들어갔다. 그러자 중무장을 한 경찰들이 도착을 했다. 그리고는 학생들을 강제로 길로 내 몰아 해산을 시켰다. 그러자 그들은 십자가를 높이 들고 옆에 있는 교회로 행진해 갔다. 그러자 이들을 지지하기 위하여 아침 기도회를 마친 옆에 있는 학교의 학생들 2,500명이 합세를 했다. 군인들이 그 교회를 포위를 했다. 그러나 십자가들을 자기들 머리 위로 높이 든 안에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주위의 세상을 빛내고 있었다. 그날 아침 울고 있는 회중들에게 설교하는 사제는 이렇게 설교했다. “십자가가 없으면 폴란드는 없습니다.”(There is no Poland without a cross)
우리도 이 십자가가 없으면 그리스도인 아닙니다.
천국 백성이 아닙니다.
이 종려주일과 함께 시작하는 고난주간에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 천국에 가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아무리 무겁고 무섭다고 하더라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가신 이 고난의 길에 참여하기 위하여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참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