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사랑” (롬 15:1-7)
우리 기독교를 가리켜서 흔히들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사랑에 대해서 가장 많이 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헝가리의 유명한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인 Franz
List의 전기에 보면 이런 일화가 나옵니다.
지금부터 약 한 세기
전인 어느 날, 독일의 한 도시에서 가난한 고아 처녀가 피아노 독주회를 한다고 광고를 했습니다. List의 피아노곡들을 연주하게 될 텐데,
자기가 바로 List의 제자라고 광고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연하게도 이 처녀가 독주회를 하려는 그 때에, List가 바로 그 도시를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처녀는 고민을
합니다. “List가 이 도시를 방문하게 되면 분명히 그 포스터들을 보게 될 텐데, 어떻게 하나, 혹 못 볼지도 모르니 그대로
있어버릴까……”
여러분이었다면 이 때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이 처녀는 심각하게 걱정을 하던 끝에 사실을 털어놓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독주회 하루 전날, 막 도착한 이 유명인사에게 꼭 만나달라고 간청을 하였습니다.
간신히 만나게 된 이 처녀는 흐느끼면서 모든 것을 고백합니다. 그런 다음에, 마땅히 가해지게
될 책망을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 동안의
침묵 끝에, List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확실히 당신은 매우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다 유혹을 받으며,
실수를 하는 법입니다. 실수를 범했을 때 할 일이라고는 뉘우치는 것과 사과하는 것뿐이지요. 나는 당신이 깊이 뉘우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당신이 연주하는 것을 이 자리에서 내가 잠간동안 듣게 해 주십시오.”
이 피아노의 대가 앞에서 연주를 한다는 것은 이 처녀로
하여금 무척이나 떨리게 했지만, 연주를 시작한 후 조금 지나면서부터 이 처녀는 침착함을 되찾고는, 자기의 최선을 다하여서 연주를
하였습니다.
연주를 듣고 난 후 몇 곳에서 교정을 해 준 다음에,
List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당신을 조금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명실상부한 List의 제자입니다. 내일 밤 당신은 List의 제자로서 연주회에 나가셔도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악장은 그 제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스승에 의해서 연주되게 될 것입니다.”
이 때 이 여자의 마음이, 그 감격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로 인하여 어떤 결과들이 생겼을 것
같습니까? 아마도 여러분들은 충분히 그 다음의 이야기를 상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List가 이 소녀에게 베풀어준 이 친절, 이 자비!
― 얼마나 굉장한 것입니까?
그러나 이러한 친절도 ― 가난한 자들,
불편한 자들, 무력한 자들, 그리고 죄인들을 위하여서 ― 아무런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온통 베풀어주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비한다면, 그저 미미한 정도일 뿐입니다.
사람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서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는
것보다도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사랑을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아이들을 보고 얼마만큼 날 좋아하느냐 물어보면, 양 팔을 잔뜩 벌리면서 ‘이만큼’ 그러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처럼’ 사랑하심! ― 어느 정도인 것 같습니까?
‘이처럼!!’ ―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몸으로’
친히 표현하여 주셨습니다.
아마도 자녀를 낳아서 키워본 부모라고 한다면, 몸으로
표현하는 사랑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병들어서 신음을 할 때, 어떤 심정이 드십니까?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아파주고 싶지
않습니까?
내 몸으로 내 자식의 아픔을 대신 짊어지고 싶다고 하는
것! ― 이것이 바로 사랑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몸으로 표현하는 사랑으로서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여 주십니다.
지난 주일에는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히브리서 12장
2절에서 권면하시는 말씀 그대로를 가지고 “예수를 바라보자”고 설교하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크리스찬입니다. 크리스찬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크리스찬이란 한마디로 예수님처럼 살아가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몸으로 표현하신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데, 우리가 베푸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들입니까? 우리는 과연 얼마만큼의 사랑을 지닌 눈으로서 이 세상을 바라보며, 다른 사람들을 대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소년이 어머니에게 생일
선물을 하려고, 일 년 동안이나 신문배달을 하여 돈을 모아가지고 백화점으로 갔습니다. 백화점 점원에게 어머니의 바지를 생일선물로 사고 싶다고
하니까, 점원은 당연히 어머니의 사이즈가 얼마냐고 묻습니다.
그런
것을 숫자적으로 알바가 없는 이 소년은 이렇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She is perfect size.”―아주 완전한 사이즈란
것이지요.
‘완전 사이즈’ 하면 어느 정도의 사이즈를 얘기할 것
같습니까?
도대체 완전한 사이즈가 얼마쯤 되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점원은 중간쯤의 아주 날씬한 사이즈를 골라 주었습니다.
이 선물을 받은 어머니는 정말 말할 수 없이
기뻐하였습니다. 물론 아들한테서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옷은 어머니에게 겨우 무릎 위에나 간신히 들어갈 그런 작은 옷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몰래
백화점에 다시 가서, 제일 큰 사이즈로 바꾸어오긴 하였지만, 그 기쁨은 하늘에 닿는듯 하였던 것입니다.
보세요! 극진한 사랑의 눈으로 어머니를 보고 있는 아들의 눈에는, 어머니는 가장 예쁘고 날씬한
어머니였습니다. 그러니 그의 입에서는 무조건 ‘완전하다’는 표현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 점원은 그 바지를 바꾸어 주면서, 비로소 ‘완전’이란 말에 대한 의미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토록 뚱뚱한 어머니였으나 그 소년이 ‘완전’이란 말로 표현한 것은, 오로지 사랑으로 보고 사랑으로 해석하는, 사랑의 세계에서만
이루어지는 표현인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우리 주님은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습니까?
‘예수님의 사랑!’
하면, 물론 ‘십자가의 사랑’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완전하신, 무한하신 그 십자가의 사랑 외에도,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그대로 닮을
수 있고, 또한 실천할 수 있는 그런 사랑들을 우리 주님께서는 무수히도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몇 가지 예들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베푸신
기적이 거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혼인잔치를 벌리고 있는데, 음식이 부족하여서 곤경을 겪고 있는 젊은 부부를 구해주시는
이야기입니다.
혼인잔치란 원래 흥청거리고, 모든 게 풍성하고 기쁨이
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음식이 그만 바닥이 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풍성한 기쁨이 순식간에 어떻게
되어버리겠습니까?
여러분이 만약 거기에 계셨더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손님들 중에는 아마도 이렇게 중얼거릴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원래가 좀 준비가 부족하고 칠칠치가 못했어. 적어도 결혼을 하려면 제대로 좀 정신을 차리고, 더 잘 준비를 했었어야지.
아마도 그들은 결혼을 하기엔 아직도 좀 모자라는 사람들인가 봐.”
아마도 엘리야나 세례요한 같은 이가 이런 상황을
직면했다면, 그들은 그 부부에게, 또는 소님들을 향하여 ‘포도주를 많이 마시는 것을 좋지 않다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강의를 하였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어떻게 하여 주셨습니까? ―
그들의 부족함을 오히려 채워주시고, 그 연회장조차도 깜짝 놀랄 정도로 은혜롭게 표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대받아 가셔서 저녁 식사를 드실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 하면 “이마에 피가 마르지 않는 바리새인” 하는 말이 있을 정도로, 참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이들 바리새인들은 모든 여자들이 정욕의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 외에는 다른 모든
여인들에게 말을 하지 않을뿐더러, 길을 걸을 때에도 아예 보지 않기 위해서 눈을 아예 감고 걸어갑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기둥에도 부딪치고
벽에도 부딪치고 해서, 이마가 노상 깨어져서 피가 흘렀어요.
이 피
흘리는 모습을 보고는 사람들이 ‘저 사람은 참으로 거룩하게 사는구나’ 하겠지요. 그러니 그 다음부터는 남들에게 거룩하게 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이마를 기둥에 부딪쳐서 피를 흘리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네에서 죄인이라고, 품행이 난잡하다고 소문이
파다한 그 여자가 이 집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여자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 발 앞에 와서는 울면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는,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며 향유를 부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장면을 ‘참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하시거나, 그저 우리 주님이 하신 일이니 의례
그러려니 하고 보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만약 이 일이 그대로 여러분의 목사인 제게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제가 그
여자를 향해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고 해보세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스캔들이 곧장 일어날 것이고요. 그뿐만 아니라, 여러분은 계속 저를 여러분의 담임목사로
여기시겠습니까?
이제 그렇고 그런 이 여자가, 거룩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바로 그들의 눈앞에서 주님의 발을 만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 것입니까? 주님의 위엄은 그 천한 여자가
주님을 만지게 허용하심으로서 산산조각이 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자를 용납하여 주셨습니다. 오히려 교만과 사랑의 부족으로 인해, 손님의 발도 씻어주지 아니한 시몬을 책망하심으로, 바리새인의
비평으로부터 그 여자를 변호하여 주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어떤 여자에 대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하면, 간음을 한 자는 돌로 때려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현장에서 잡혀왔으니, 뭐라고 변명하겠습니까? 또 그 부끄러움이야
오직하였겠습니까?!!
이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저
땅에 몸을 굽히시고는 무어라고 쓰시다가, 조용히 일어나셔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서 쳐라.” ― 그리고는 다시금 몸을
굽히시고는, 계속 무어라고 땅에 쓰고만 계십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정말로 얼마나 아슬아슬함을 느끼게 되는지 모릅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서
쳐라!”
만약 요즈음처럼, “내가 무슨 죄를 지었어, 난 내
양심대로 착하게 살아왔어, 난 회개할 것이 없어” 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고 한다면, 또는 어떤 사람이 순전히 오기로라도 ‘난
죄가 없어’하고 돌을 던졌더라면 어떻게 됩니까?
그 순간 돌멩이들이
소나기처럼 날아오게 됩니다. 그 여자뿐만 아니라, 바로 그 옆에 있는 예수님 또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너의 부족함을 내가
감당하겠노라. 너의 그 죄를 위해 내가 죽어주겠노라!!”
주님께서
베푸신 사랑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돌을 들어서 치려든 자들이 다 물러간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용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우리 스스로를 깊은 마음으로 되돌아보십시다. 우리는
모두가 다 크리스찬입니다. 어떤 자가 크리스찬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그가 가신 길을 가며, 그가 하신 대로 따라서 하는,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들이 바로
크리스찬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이런 사랑을 그대로
배우며, 따라하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크리스찬인 것입니다!!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말씀은 우리 크리스찬이
마땅히 나누어야 할 ‘사랑의 삶’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며 돌보아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를 않으시고, 우리 모든 인간의 약점을 채워주시고 담당하여 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며, 예수님처럼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1960년대의 미국은 한창 히피족들이 극성을 떨던
당시입니다.
오레곤 대학교에 다니는 어떤 학생이 있었는데,
장발에다가 누더기와 같은 청바지를 입고는, 헐렁한 잠바차림으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맨발로 다닙니다.
어느 주일날 아침에 이 학생이 평상시의 복장대로, 샌들을 신은 채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예배는
벌써 시작이 되었었는데 좌석을 찾으면서 가운데 복도로 들어서자, 어떤 교인들은 상을 찡그리면서 어색하게 그를
쳐다봅니다.
좌석을 금방 찾지를 못하자, 이 청년은 흔히 히피들이
그러는 것처럼, 예배당 가운데의 통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이런 행동은 확실히 보통 교회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일이지요. 그래서 예배분위기가 아주 어색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그 학생을 향해서 복도로 걸어갔습니다. 바로 그 교회의 장로님중의
한분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장로님을 쳐다봅니다. 그를
나무랄 것인가? 조용히 밖으로 나가달라고 타이를 것인가?……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 장로님이 그 학생을 조용히 책망하며 나무랄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장로님은 그 학생
곁으로 가서는 그와 함께 나란히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펴서는 함께 봅니다. 찬송도 펴서는 함께
부르고요!
둘 다 그날 아침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예배를
드렸고, 함께 예배를 드리던 모든 교인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습니다!
“너희 강한 자는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들이고 사랑하신 것처럼, 너희들도 서로 용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지시하여 주십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을 보세요. 혈루증을 앓는
자와 문둥병자들을 고쳐주실 때, 그들이 ‘나는 부정하다’고 손을 휘저어도 오히려 손을 내밀어서 그들을 만져주시고, 몸으로써—피부로써 그들에게
사랑이 전달되도록 하여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하여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 거칠고 변덕스러운 어부였던 베드로로부터 시작하여서, 신분이 높고
교양이 있는 니고데모에 이르기까지 ― 비천한 자, 가장 작은 자, 마지막인 자, 그리고 잃어버린 자들 모두와,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동일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바로 여기서부터 우리 크리스찬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과는 분명하게 다르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어떠한
세상입니까?
이기적인 세상! 자기만을 위하는
세상!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남을 생각하고, 남을
배려하고
그래서 봉사하고, 베풀고,
헌신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삶,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예수님처럼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삶! ―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아주
중요한 점이 등장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너희도’라고 하는 바로 이 말씀의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말씀하시는 ‘너희도’는 누구를 가리킨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집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마침 그 집을
방문했던 그 집 부인의 친구 되는 분이 전화를 대신하여 받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 되는 분이 ‘여보세요’하는 바로 이 한마디 말도 하기 전에,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소리
소리를 지르면서 욕을 퍼부어 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목소리를 듣고는, 이 친구 되는 분은 전화를 걸어온 그 사람이 바로 이 집의 주인 남자란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겨우 이 친구 되는 분이 한마디를 하게
되자, 전화를 걸어온 이 집의 주인 되는 분은 자기가 아주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겸연쩍게 한다고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미안합니다. 난 내 아내인줄 알고 그만……”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면 아내한테는 아무렇게나
무례하게 대해도 좋다는 것입니까?
참으로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너무나도 자주 그들의 사랑하는 자에게 보다도,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는 예의를 지키고, 관대하고, 은혜를 베풉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사랑해야
할 사람에게는 무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여러분은 누구하고 제일 많이 다투십니까? 여러분은
아주 나쁜 사람들, 예를 들어서 살인강도와 싸워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식인종이나 악질분자와 싸워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공산당 빨갱이들과
싸워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실 그런 나쁜 사람들과 싸워본 적은
아마도 대부분 없으실 것입니다. 그 대신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에게 오히려 무례하게 해버리는 일들이 오히려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삶,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예수님처럼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삶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까?
예수님의 사랑은 외부의 다른 사람들에게로만 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족들에게로!’―바로 여기서부터 우리 주님의 사랑은 충만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어머니 마리아의 장래를 생각하시며,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지요. 이같이 주님의 사랑은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하여, 온 인류 모두에게로 확장되고 전파되어 나간
것입니다.
로마서 9장 3절에서 사도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말씀하시며, 디모데전서 5장 8절에서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 사랑을’
부르짖으면서도, 실제로 그의 삶 속에 사랑이 깃들고 있지 못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랑을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피상적으로 생각하고, 저 멀리서 막연히 실천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자신의 삶과 연결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는 바로 나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 가정에서, 그것도 바로 부부 사이에서부터, 그리고 우리 교우들 성도 상호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남편의 약점을 담당하고, 아내의 부족한 점을 용납하고, 우리 주님이 우리를 받아들이시고 대신 감당해 주신 것처럼, 서로가 용납하며 사랑을 실천해 나갈 때, 바로 그 사랑이 부모를 공경하게 되고, 바로 그 사랑이 교회에서는 교우들을 용납하고 사랑을 베풀며, 바로 그 사랑이 이웃의 모든 사람들에게로 사랑을 베푸는 삶으로 확장되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더욱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을 때, 받은 바 그 사랑을 깨달아 내 속에서 넘치게 할 때, 우리는
사랑하는 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
더욱 더 주님을 본받아,
예수님의 그 사랑으로서 더욱 더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