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과 결혼생활” (마5:31-32, 19:3-9)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은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제자들에게 설교하신 말씀으로써, “산상수훈”이라고 특별히 부르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그 듣는 자가 일반 대중들이 아니라 제자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미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불림을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 된 우리 크리스찬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내용들을 이 속에 담고 있습니다.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말씀 마태복음 5장 31절, 32절 말씀은 특별히 “너희는 이렇게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는 형식으로 말씀하신 일곱 개의 말씀 중에서 세 번째로 하신 말씀으로써, 우리 크리스챤의 결혼과 가정생활에 대해 특별히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어떤 명언집에 이런 말이
있더군요. “왜 남자들끼리 살지 아니하는가?”
그 대답이 무엇인고
하니, 그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자가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남자인
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이 옳지 아니함으로 ‘돕는 배필’로 여자—하와를 만드시고, 함께 살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받아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이니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하는 것!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 성경이 말해주는 결혼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결합관계가
영원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부부의 관계도 또한 영구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구적인 결혼이 실제 생활현장에서는 그리 완전치 못하고, 불화와 싸움이 있고, 그래서
영구적이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바로 우리가 사는 현실의 문제점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책에서 읽은 것인데, 부부싸움을
하는 데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더군요.
첫째는
냉전형인데, 며칠이고 서로 말도 않고 버티는 것이지요.
다음은
단식형, 설명이 필요 없겠지요?
그리고는 가출형이 있고, 전투형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무시형도 있고, 타협형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슨 형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까?
결혼을 앞둔 처녀 총각들은 대부분 무지개처럼 이 결혼을 생각하지만, 그러나 막상 살아가노라면 많은 문제점들이 그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이 살아본 사람들 모두 다가 고백하는 얘기입니다.
어떤 프랑스의 작가는 결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꽁트를 남겼습니다.
결혼에 대하여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고 묻는데,
연극배우는 결혼을
“희극과 비극이 섞인 극”이라고 표현합니다.
상인은 “위험한 투기”라고
말하지요.
또 군인은 “30년 전쟁”이라고 결혼을
표현하고
의사는 그의 챠트에다가 “열병, 고열에서 차츰 열이
떨어짐”이라고 씁니다.
음악가는 결혼을 “합창, 그러나 소프라노와
앨토가 강함”이라고 표현합니다. 소프라노와 앨토는 모두 여자들의 part가 아닙니까?
또 일기예보관은 결혼의 앞날을 “맑고 구름, 때때로 천둥”이라고
예보하고,
약제사는 “자극적인 알약, 맛이 씀”이라고 설명을 달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결혼을 무지개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더란
게 바로 이 작가가 발견하고 있는 점입니다.
오늘 성경말씀도 어느 정도 이
사실을 전제로 하고 말씀하시는 것임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살인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하시는 것이며, 간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간음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가정이란 영구적이고 완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 불완전하고 위태위태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특별히 ‘우리 크리스찬들은 이 결혼생활에 어떻게 임해야 하겠는가?’ 하는 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세 가지 표제로써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먼저, 모세의 율법은 이 문제에 관해 무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다음으로,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리고 주님께서는 여기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먼저, 모세의 율법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 대답은 신명기 24장, 특히 1절부터
4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읽게 되는 부분이 아닌데, 같이 한번 찾아보도록 하십시다. (p.
298)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의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의 둘째 남편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냈거나 또는 그를 아내로 맞이한
둘째 남편이 죽었다 하자. 그 여자는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보낸 전남편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범죄하게 하지 말지니라.”
여기 보면 “수치 되는 일”이란 말이
나옵니다. 또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증서를 주고 내보내라”는 말이 나옵니다.
“수치 되는 일”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이혼증서”를 주라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이혼을 허락하는
말씀입니까?
그래서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나와서는 시험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좀 안된 얘기입니다만, 어떤 문제로
소송을 하게 된 분과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분 말씀이 변호사를 “면허 딴 도둑놈”이라고 몰아붙이더군요.
아무것도 아닌 문제였는데, 어떻게 변호사가 알아 가지고 상대방을 부추겨서는, 법 조항을 요렇게
저렇게 갖다 붙여서는 엉뚱하게 큰 일로 만들었답니다. 할 수 없이 자기도 변호사를 샀는데, 이쪽 변호사도 교묘히 법 조항을 ― 같은
조항인데도 요렇게 저렇게 돌려서는 엉뚱하게 풀어가더란 것입니다.
가령
구두를 신은 채 이 안에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말이 있다면, 이 뜻은 분명 “신발을 벗고 들어오라”는 뜻으로 한 말일 텐데도, 이게 변호사에게
가면 “이 조항에서는 구두라고 했지 운동화도 안 된다고 그러지 않았다” 하는 식으로 돌려버리더란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해석하는 방식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들은 이혼증서를 주면 된다고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이 이혼증서란 간단한 이혼증명서인데, 요즈음처럼 서로 합의를 하여 같이 도장을 찍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일방적으로 하는 ‘이혼 통고’였습니다.
그러니까 ‘여자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지금부터 이 여자는 내 아내가 아니요”하고 남자가 싸인만 하면, 그것으로 이혼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 이혼증서를 써 주었는가
하면, 율법에 “수치되는 일”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기뻐하지 않는 일 ― 그래서 그것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면 준다는
것입니다.
“수치되는 일”이란 무엇인가? 유태인들은 자기 편리한대로
해석을 합니다. 옛날에 “칠거지악”이란 말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런 게 모두 해당합니다.
탈무드란 율법 해석책을 볼 것 같으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음식을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증서를 준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음식 만드는 뒷모습이 보기 싫다고 해서 이혼증서를 준 경우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를 시험하는 바리새인들이 “모세는 이렇게 이혼을 허락했지 않습니까?” 하고 말할 때,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바로 너희들이 이같이 악하기 때문에 모세가 준 율법을 악용하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결코 율법의 근본정신이 아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율법은 오해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 때문이지, 본래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닌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규정이 있습니다.
언뜻 들으면 아주 단단히 보복을
하라고 우리는 충동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 ‘원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에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있는데, ― 누가 내 한쪽 눈을 상하게 하여 실명하게 되었다고 하면, 그 다음 내가 보복을 할 때는 어느 정도 보복을
합니까?
제가 대학 다니던 시절 고재봉이란 사람이 아주 유명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대대장에게 기합을 받은 것에 앙심을 품고는, 며칠 뒤 도끼를 들고 밤에 가서는 대대장뿐만 아니라 그 가족 전체를 몰살시켜 버렸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죽은 그 사람과 가족은 그 날 새로 전근해온,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의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눈은
눈으로 끝나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이’를 부러뜨린다면, 너희는 ‘이’ 이상의 것을 해할 권리가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 인간의 이런 복수심과 혼란상태에 ‘질서’를 주시기
위한 것이지요.
결혼에 대해 율법을 주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툭하면 싸우고 헤어지기 쉬운 우리 가정에 질서를 마련해
주시려는 게 그 목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점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라”
그러므로 음행한 연고 이외에 이혼증서를
남발하여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몇 가지의
큰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로, 결혼을 깨뜨릴 때―즉 이혼하게 될
때에는, 반드시 이혼증서를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가정의 파괴를 네 감정에 따라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뜻입니다.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라!! 그리고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네가 꼭 깨뜨려야만 하겠는지, 거기에 합당한―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는지 증인을 세우고, 그 이유를 확증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어떤 부부가
이혼을 하려고 하기에, 상담을 하던 중 바로 이 말씀을 드렸더니, 그분들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자기들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이 아니고
사람이 짝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누셔야 한다’고요.
일이 이 정도
되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거지요.
그래서 그들은 기어코
헤어집디다만,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다음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여기에다가 “음행한 연고 없이는”이라는 확고한 단서를 부치셨습니다. 율법에 “수치되는 일”이라고 했는데, 이 말을 사람들이 오용하기 때문에
이렇게 명확한 단서를 부치신 것입니다.
혹 머리 좋은 어떤 사람들은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이렇게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그러면, 아내나
남편이 음행하기만 하면 이제는 이혼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가 되지 않겠는가.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는걸…!” 그러면서 이 말씀을 자기
합리화의 도구로 사용하려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음행”이란 이 말을 성경
원어로 보면 포르네이아(porneia)란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영어로 매춘(賣春)을 가르키는 porno란 단어가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음행”이란 이 단어의 뜻은 ‘성(性)을 팔았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을 ‘상품화’하는 그런
정도로 아내가 타락하고 남편이 타락되었다면 ― 이혼할 정당한 근거를 가집니다.
그러나 단 한번 실수 때문에 ― 아내를 또는 남편을 버려도 된다는 그런 뜻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되는
말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을 ‘상품화’하는 그런 정도로 배우자가 타락한
경우가 아니라면, 서로가 상대를 사랑으로 용납하고, 그래서 가정을 지켜야 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교훈은
이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일단 이혼증서를 쓰면, 그 후로는 다시 그와 결합하여 살 수 없도록 막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이 율법이 없이는
남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결혼하고, 또 자기 마음대로 아내를 버리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혼증서를 주면, 그 여자완 다시 결합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그만치 신중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부부들은 툭하면 싸우고, 싸우기만
하면 이혼한다고 그러질 않습니까?
이 율법은, ‘이혼’이란 게 부부싸움
할 때마다 툭하면 튀어나와도 좋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결혼이란 그들이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또 화난다고 도장 찍고, 그렇게 쉽게 처리할 수 없는
것임을 단단히 못박아두는 것입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가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흔히 사람들은 간음한 결과만을 가지고 왈가왈부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간음하도록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입니다. 남편을 간음하게 하는 아내도 사실은 간음이요, 아내를 간음하게 하는 남편도 간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간음한 자만이 죄 있다고 하고, 간음하게 한 자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간음하게 한 자’도 간음이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부부생활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고린도전서 7장
3절에서 5절 말씀을 다같이 찾아보십시다.(p.270)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고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기도할 틈을 가지기 위한 것 외에는 분방하지 말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게 구실이 되어서 가정생활을 결단코 등한히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보면, 신앙생활에 충실한 자가
가정생활에도 충실하고, 가정생활에 충실한 자가 교회생활에도 충실한 것을 봅니다.
교회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가정에 충실치 못하다면, 그 교회생활은 하나의 허위일 뿐이고,
구실일 뿐이란 게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점을 여러분, 명심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결단코 ‘이혼해도
된다―이혼해서는 안 된다’ 하는 그것을 논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결혼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가정이
이룩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
네가 이혼했느냐 안했느냐, 이혼하려 하느냐 안하려 하느냐
하는 이것이 아니라 ― “하나님 앞에서 네가 어떤 가정으로 되고 있는가? 어떠한 네 자신으로 나타나고 있느냐?” ― 이것을 묻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지난 12년 동안
한집에서 같이 부부로 살면서도 서로 등을 대고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연세가 많은 분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들이 이혼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성경에 이혼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이혼 않고 지냅니다. 교회도 다니고요. 그런데 속으로는 완전히 남남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런
것입니까?
단지 이혼만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가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까?
남편과 나 사이의 관계, 아내와 나
사이의 관계!
자녀와 나 사이의 관계, 부모와 나 사이의
관계!
이것이야 말로 내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역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우선순위에
두세요. 그리고 행복한 부부관계를 가지세요. 부부관계 속에서 참 아름다움을 누리세요. 그래서 사탄이 틈을 타지 못하게
하세요!!
우리의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생활―능동적인 가정생활이야말로, 죄를 극복할 수 있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전진기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크리스찬들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누리기를 기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고독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성(異性)을 주시고, 결혼하게 하시고, 가정을 주신 것입니다.
아담을 위해 하와를 지어 만드시고, 이 신부를 아담 앞으로 친히인도해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하나님께서 짜기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참된 신앙생활은 참된
가정생활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이 말씀을 여러분 마음속에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