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 14:1-6),김서년목사


   오늘 본문말씀에서 우리는 ‘근심하지 말라’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 ― 이 말씀은 우리가 근심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시는 말씀이지 않겠습니까?  사실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는 근심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다 있지 않습니까?
   때때로 우리는 이것만 해결되면 나에겐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만,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제까지 우리가 살아오면서 경험해온 바와 같이, 그것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다 형통해 질 줄로 생각했었지만, 그런데 막상 그것이 해결되었을 때 더 이상의 근심 걱정이 생기지 않았었습니까?
   이것이 해결되고 나면 저것이 생기고, 저것이 해결되고 나면 또 다른 무엇이 계속 생겨왔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인 것이지요!

   왜 우리 인생에 ‘근심’이란 게 있는 것입니까?
   만약 이 근심이란 게 필연적으로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이 근심이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까? ― 아마도 이것이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먼저, 왜 우리에게 근심이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 문제에 어떤 대답을 가지고 계십니까?

   오늘 분문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바로 이 말씀을 주님의 목전에서 듣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일차적 대상이 되는 제자들이 ‘왜 근심에 차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근심하게 되는 원인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지금 근심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정황을 살펴보면, 우리는 네 가지의 이유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무지(無知)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왜 십자가를 져야 하며, 또한 어디로 가시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3년씩이나 따라다녔지만, 지금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전혀 몰랐습니다.  이 ‘무지’가 저들을 근심하게 한 것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만약에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을 하나하나 잘 깨닫고 있었다고 한다면, 지금 이 순간은 걱정할 시간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 동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역사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바로 나를 위한 구원의 시간이 열리는 것이고, 나아가서 온 인류를 향한 구원이 바로 이 십자가를 통하여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몰랐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에서 근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근심의 일차적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세속적인 욕망 때문입니다.  이들은 지난 3년 동안 세속적인 욕망으로 예수님을 따랐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보면, 이들은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유대나라의 왕이 될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의 우편에 앉고 누가 좌편에 앉을 것인가’ 하고, 자기들의 서열 문제로 자리다툼까지 하면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진다, 어디론가 간다’는 말씀을 하시니, 자기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근심의 절반은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 없는 사람은 그만큼 근심도 없습니다.  여러분, ‘아픈 것’과 ‘근심’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대개 아픔으로 오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욕망 때문입니다.  특히 세속적인 욕망―자기중심적인 욕망은, 사람의 마음에 심한 정신적인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걱정거리가 많습니까?  걱정하며 소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나님께 구하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의 근심이 어디에 기인하는 것인지, 무엇 때문에 걱정하는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십자가’ 때문에 걱정을 합니다.  십자가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딘가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고 무서운 고난이 앞에 있음을 어렴풋이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실 때, 많은 여자들은 ‘울면서’ 따라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걱정거리가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앞에 있는 어떤 고통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의로운 죽음―의로운 희생으로써, 걱정거리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말씀하시기 바로 직전의 상황인 오늘 본문 앞의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시며,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로 걱정을 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어디론가 가신다고 하니 저희들만 남는다는 외로움, 다시 말해서 고아와 같이 버림을 받는 것 같은 ‘고독감’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이 연속되는 18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제자들을 보세요.  마치 어린 아이가 낯선 거리에서 어머니 손목을 놓쳤을 때 불안해하는 그런 종류의 걱정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14장, 15장, 16장에서 계속하여 ‘너희들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보혜사를 보낼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오히려 너희에게 유익이다.  성령이 보혜사로서 너희를 위로할 것이다.’ 하시며, 걱정하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걱정이란, 하나같이 불 신앙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써, 귀중한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 근심에 대하여서 해결방안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바로 이점을 우리 모두 마음속에 깊이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믿음’이 바로 근심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소원성취가 근심을 해결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큰 잘못입니다.  가령 ‘돈 버는 것’이 소원인 사람이, 그가 원하는 만큼 돈을 벌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근심이 사라지는 것입니까?  그렇지가 않지요!  오히려 이 돈을 어떻게 잘 지킬까 하고 더욱 걱정이 커지게 되며, 오히려 불안까지 겹치는 것입니다.
   출세가 소원입니까?  출세하지 못하면 물론 불만이지만, 그러나 출세하고 나면 불안하게 됩니다.  원래 으뜸—톱(top)의 자리란, 언제 누구에 의해 다시 떨어질지 몰라서 항상 불안하고 초조하기 그지없는 그런 위치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전전긍긍하는 것을 보게 마련인 것입니다.
   결국 소원이란, 이루어지기 전에는 ‘불만’이고, 이루어지고 나면 ‘불안’으로써, 근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심의 종류가 바뀔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심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믿음’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무엇을 어떻게 믿으라는 것입니까?  ―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 그대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하나님을 믿는 그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나를 믿으라’고 이같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만이 보장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듯이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자만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으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아버지’ 하나님이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은’ 하나님이요,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이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시는’ 하나님이며, 오늘도 계속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써, ‘사랑의 하나님’이요 ‘십자가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냥 하나님만을 바라보면 ‘두려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모든 종교들을 보세요.  소위 그들의 신 앞에서 그저 떨고만 있습니다.  두려워서 말이지요!
   그러나 예수를 통하여 바라보면,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십자가 없이는 오늘 내가 여기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바로 ‘자신을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유일한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그 신실한 약속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나를 믿으라’고 하신 말씀은 ‘약속’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배우고’ 예수님을 ‘배우면서’―다시 말하면 ‘앎으로써’ 깨닫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그저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 알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모든 것을 다 깨닫고 믿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다 깨달음으로써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고대 교부중의 한 사람인 ‘터틀리안’이란 사람은 “우리가 앎으로서 믿는 것인가?  믿음으로서 알게 되는 것인가?” 하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앎으로서 믿게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믿음으로서 알게 되는 것입니까?
   어느 순간에서는 알지 못하면서 믿어야 하고, 지금은 납득할 수 없지만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믿음으로서―모르던 그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금은 너희가 모르지만, 이 후에는 알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내게 말씀하신 그 분을 믿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분의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신뢰하는 그 분을 믿기 때문에, 그것이 그분이 한 말이기에 우리는 그냥 믿는 경우가 참으로 많지 않습니까?  믿기 어려운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분이 그렇게 말하였다면 그것은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 나는 믿는다’ 하고 우리는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다 알고, 다 경험하고, 그리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천당이란 게 과연 있는지 없는지 가보아야 믿겠다고 말합니까?  가보고서야 알 때는 이미 끝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오직 단 한 번뿐인 경험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내가 알아야 하고, 경험해야만 믿겠다’고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아는 것은 알고, 납득이 되는 것은 납득하며, 깨닫는 것은 깨닫되;  알 수 없어도 믿고, 깨닫지 못해도 수락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질 때만이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고, 평안해 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미래적인 것은 내 경험에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서만 근심을 몰아내고,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래’란 어차피 직면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하고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란 하나님이 계신 곳, 바로 ‘천국’-‘천당’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가 계신 곳!’ ― 마태복음에 보면 서른 네 번이나 ‘하늘나라-천국’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마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열여섯 번,  누가복음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라고 서른 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두 번만 나오고, 그 대신 ‘영생’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용어만 다를 뿐, 하늘나라와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주권적’인 의미가 강하게 표현되고, ‘영생’이라고 하면 ‘개인적’인 혹은 ‘생명적’인 의미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이란 단순히 ‘시간의 무한정한 연장’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을 시간을 초월한 것으로써, 오늘도 예수 안에서 사는 것이 영생이며, 이 육신이 죽은 후에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도 영생으로서, 현재와 미래를 다 포함하여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현재를 무시하고, 저 앞에 있는 하늘나라만을 중요하게 여기려고 하고;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현재만을 중요하게 여기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잘 살고, 평등하고 번영을 누리며 자유롭게 하는 사회에만 치중하려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도 현재에만 치중하려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먼 미래에만 치중하여 생각하려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편으로만 치중하는 것은 잘못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 두 살 되던 해에 예루살렘 성전에 부모님을 따라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예수를 잃어버렸다고 찾아 헤매든 분들에게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몰랐습니까?”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을 이렇게 현재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미래형 시제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집’은 이제 주님께서 가실 곳, 또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실 곳, 그러니까 미래적인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집은 미래이면서도 동시에 현재의 의미, 이 둘 다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영생’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처소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공간적인 의미와 시간적인 의미를 동시에 말씀하시며, 나아가서는 질적인 의미를 말씀하십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예비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다’라는 말은 십자가를 지고, 부활 승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을 전제로 한 ‘아버지의 집’이며 ‘영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지며, 가게 되며, 또한 지금도 예수를 나의 주님이요 구세주로 영접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집’이며 ‘영생’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  천당이 어디에 있느냐?’  의심하며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요,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간단명료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천당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육신이라고 하는 이 유한성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육신에 우리가 있는 한 우리가 이 눈으로는 보지도 못하고, 또 어떤 것인지 완전히 알지도 못하는 것이 바로 이 천국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믿을 수 있으므로 그것이 ‘그가 하신 말씀’이기에,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바로 여기에서 근심의 문제가 해결되며, 평안이 있고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오직 주님을 믿음으로써 가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아버지의 집입니다.  바로 이 ‘아버지의 집에 간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써 우리는 오늘의 모든 근심에서 해방되며,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무지와 빈곤과 질병이 있고, 땀과 눈물과 피의 흘림이 없이는 살아 갈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이 세상에서 사는 한, 우리에게 근심과 걱정은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나라!―바로 이 ‘영생의 신앙’을 가짐으로써만, 우리가 오늘의 근심과 걱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생’은 현재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새로운 사람으로 창조됩니다(고후 1:17).  성경에는 이것을 거듭난다고 했습니다(요 3:3).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사람으로 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자손으로서의 옛 사람이 아담을 닮아 이 땅의 것처럼 살게 되듯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새 사람은 그리스도를 닮아 하늘의 것 같이 살게 됩니다.  하나는 육이요 하나는 영입니다.  육은 그 성질상 썩어져버릴 수밖에 없으나, 영은 그 본질대로 영원히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동안에는 아직은 여전히 육을 입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슬퍼도 하고 고통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는 그때부터 얻게 된 영적인 생명은, 육의 생활이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더 강하여지고 단련되어져서, 육의 생명이 끝나는 날에 홀연히 비약하여 ‘영원한 생명 그 본연의 자세’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원한 생명은, 우리가 죽은 뒤에 훗날 언젠가 얻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벌써 얻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하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면, 과연 믿기만 하면 영생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누구든지 믿게 될 때,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열리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배반하고 살던 사람이 하나님이 아니면 못살 줄 알고,  ‘하나님을 위하여’라면 모든 것―재물과 시간과 나아가서는 생명까지라도 바치며 섬기게 됩니다!
   이전에는 세상 낙이 기뻤지만, 지금의 기쁨은 오직 예수가 됩니다!
   이것은 결코 구름을 잡는 것 같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고 하신 말씀을 실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실패도 고난도 질병도, 심지어는 박해받는 것까지라도,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유익케 하여 주시는 것을 믿게 되고(롬 8:28), 그래서 죽음의 고통까지도 달게 참아 이겨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외아들까지라도 아끼지 않고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주셨는데, 외아들까지 주셔서 구원해 놓은 나를 어찌 버리시겠는가!(롬 5:8, 8:32)  구원해 주신 것은 당신과 영원히 함께 살게 하기 위하심인데, 구원해 놓은 나를 어찌 사망에 버리실까보냐! ― 결단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확신 속에서 살게 됩니다(요 10:28, 롬 8:39).

   그러므로 이 ‘영생신앙’으로 인해서, 불공평과 부자유와 불만족과 원한과 시기가 차있고, 늘 질병과 공포에 위협받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그 ‘영생’을 바라보며, 감사와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영생, 곧 영원히 사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은
죄가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부활이 무엇인지,
삶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로 알게 되면,
영생신앙은 너무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드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영원한 생명의 나라가 ‘천국’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 주님이 계시고
앞서 간 친지와 친척들이 있는 곳이니,
우리는 기쁨으로 그곳을 동경하고, 또 가게 됩니다.
이 영생신앙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절망과 암흑에 쌓인 이 세상에서
위로와 희망과 빛을 받을 수 있으며,
또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를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대림절 첫째 주일을 지키고 있는데, 우리가 대림절을 지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오후시간에는 ‘한 영혼’을 초청하는 귀한 잔치를 배설하게 됩니다.  이런 잔치를 배설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대림절 첫째주일을 지키며,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금 우리 마음속에 깊이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네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